Posted
Filed under 건축의 언저리에서(짧은글 모음)
한국일보 6월 1일자에 게재된 기사이다.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에 썼던 원고 중 결론 부분을 중심으로 작성한 기사이다. 기사의 제목이 다소 애매한 내용으로 나왔다. 애초에 썼던 제목이 너무 밋밋했던 모양인데 필자와 사전 협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혹시 다음에 쓸 기회가 있다면 좀 더 선정적인 제목을 미리 써야할 것 같다.... 제목을 바꾼다면 "궁궐은 정치권력의 문화적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배경"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내가 쓴 글은 궁궐이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지 궁궐 근대건축물이 배경이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은 원고의 PDF 파일이다.

2010/06/01 10:07 2010/06/01 10:07
Posted
Filed under 외부활동

2010년 5월 25일에서 5월 29일까지 한국리더십센터 성공원에서 4박 5일동안 진행된 7Habits Facilitator 양성과정을 이수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0/05/31 21:04 2010/05/31 21:04
Posted
Filed under 건축의 언저리에서(짧은글 모음)
* 2009년 11월에 발간된 '궁궐의 논물, 백년의 침묵'에 실린 원고임.

□ 궁궐의 근대 건축, 100년의 역사

조선왕조에 의해 오백여년 동안 형성되고, 유지되어온 궁궐 체계를 해체하고 파괴하면서, 그 자리에 근대 건축물이 들어선 지난 백여 년의 기간은 우리의 전통 사회와 국가 체계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정치 권력, 경제 구조, 문화 환경 등이 모두 새로운 체계로 대체되는 기간이었다. 그러한 광범위한 변화와 대체의 과정을 상징적이며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물리적 결과물이 곧 궁궐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0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의 기간에 궁궐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 중에서 그 실체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은 약 20여동 정도이다. 그 중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건축물도 절반에 달한다. 궁궐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 그 100여년의 역사는 건축을 둘러싸고 있는 광범위한 역학관계와 맥락 속에서 건축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며, 작동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궁궐에 들어선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진 것은 경복궁의 관문각과 경운궁의 구성헌, 정관헌, 중명전, 돈덕전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실 또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지은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이 건축물들이 진정으로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의지와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궁궐의 일부로서 왕실과 황실에서 주로 사용했던 건축물임에는 틀림없다.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는 장소였거나 휴식과 접견의 장소, 다양한 공적, 사적 행사의 장소였다. 그리고 오백년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져 가는 한 왕조의 마지막을 증언하는 장소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건축물 중 상당수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단지 한, 두 장의 사진과 몇 줄의 기록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것은 전통세계의 해체와 새로운 세계로의 교체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궁궐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들은 그 지어진 장소와 기능 등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함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대한제국기에 이미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던 경운궁을 벗어나 창경궁을 비롯하여 소규모 궁이었던 경모궁, 운현궁, 달성궁 등이 대상이 되었다. 지어진 건축물도 석조전과 같은 궁궐 건축과 함께 온실, 병원, 주택, 은행, 박물관 등 변화된 근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건축물의 양식적 특성도 다양했다. 서양 고전주의 건축 양식에 충실하고자했던 건축물에서부터 고전주의의 의장 요소를 과장하여 표현한 건축물, 공학적이며 실용적인 접근이 드러나는 건축물, 그리고 일본의 전통양식을 적용한 건축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건축물에서는 공통적으로 새로 등장한 정치적, 사회적 체계를 서둘러 정착시키고 안정화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이렇게 새로 형성되고 공고해진 변화의 정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경복궁의 근정전 앞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는 이제 모든 권력과 사회 체계가 철저하게 변화되었고 공고해졌음을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더 이상의 변화는 없고,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듯 웅장하면서 섬세한 돌 건축이 갖는 미학적 특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치 권력이 종종 고전주의 건축이 갖는 형태적 완결성과 위계성을 충분히 이용해 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 자체의 양식적 특성 뿐만 아니라 근정전에 대비되는 위치 선정과 물리적 크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의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1930년대 궁궐 내에 지어진 주요 근대 건축물은 미술관이었다. 궁궐은 정치 권력의 문화적 면모를 과시하기에 적절한 일종의 배경이 되었다. 1910년대에 궁궐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처럼 새로운 사회체계를 드러내기 위한 서두름도 1920년대와 같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의 과시도 아니었다. 궁궐은 필요에 따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무대 장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1970년대와 90년대까지 궁궐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은 박물관이라는 또 다른 문화시설 이었다. 공교롭게도 경복궁에는 2번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어졌고, 경희궁에는 지자체의 박물관이 지어졌다. 정치 권력의 주체는 바뀌었지만 새로 지어진 건축물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궁궐에 대한 시각은 1930년대와 해방 이후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궁궐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혹시 이전의 시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궁궐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2010/05/13 09:38 2010/05/13 09:38
Posted
Filed under 건축의 언저리에서(짧은글 모음)
* 2009년 11월에 발간된 '궁궐의 논물, 백년의 침묵'에 실린 원고임.

□ 기타 궁궐과 근대 건축물

  ■ 경모궁(景慕宮) 대한의원 본관

서울대학교 의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1908년 대한의원 본관으로 세워졌다.[그림 36] 대한의원 본관이 세워졌던 이 자리는 경모궁과 함춘원(含春苑)이 있던 자리였다. 경모궁은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인 헌경왕후를 위한 사당으로 지었던 건물로 1839년 소실되었다. 함춘원은 창경궁 동쪽에 있던 부속 동산이자 후원이었다. 대한의원 본관은 당시 탁지부 건축소의 기사였던 야바시 겐끼찌(矢橋賢吉)이 설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08년 11월 완공하였다. 벽돌조 2층 건물로 건물 중앙의 시계탑이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서양 건축의 네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중앙의 시계탑을 중심으로 대칭형으로 구성하였고 경사지붕으로 처리되었다. 시계탑의 상부에는 작은 돔을 올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고, 해방이후부터 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운현궁(雲峴宮) 이준 저택

운현궁은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저택이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본궁이 되어 궁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대원군이 1898년 별세한 이후 운현궁은 고종의 형인 이재면에게 상속되었고 1912년 이재면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준용에게 상속되었다. 이준용은 이재면이 사망한 후 이름을 이준으로 개명하였다. 운현궁 이준 저택은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에 신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의 설계는 일본인 건축가 가타야마(片山東態)가 하였다. 서양 건축의 네오 바로크 양식을 따른 벽돌조 2층 건물로 정면 중앙의 현관은 아치와 붙임기둥으로 처리하였다.[그림 37] 좌우 대칭형의 건물로 건물의 중앙부는 돔 형식의 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좌우에는 아치가 연속된 아케이드 형식의 발코니가 만들어졌다. 외벽은 벽돌에 모르타르를 발라 마감하였다. 1917년 이준이 사망하자 순종의 형제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에게 상속되었으나 해방 후 미군정청에 접수되었고, 1946년 8월부터 덕성여대가 소유하고 있다. 현재는 덕성여대 재단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달성궁(達城宮)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1912년에 완공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세워졌다. 원래 이 자리는 달성궁이 있던 자리로 이 건물 신축 당시에 몇 채의 큰 한옥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1885년 5월 서울에 온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선교사는 1895년 달성궁 내의 한옥을 구입하여 1907년까지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달성궁을 헐고 1907년 착공하였다. 완공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철근콘크리트조 건축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축물이었다. 건물 중앙에 현관을 만들어 좌우대칭으로 구성하고 외장은 화강석으로 마감하여 서양 석조건축의 육중함을 표현하였다. 좌우측의 원통형 계단 상부에 설치된 돔이 전체적인 외관에서 특징적인 요소로 사용되었다. 일본인 건축가 다쓰노 깅고(辰野金吾)가 설계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1958년 보수하였고 2001년 6월 화폐금융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그림 38]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경희궁

경희궁이 결정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1909년(융희 3년)이었다. 통감부는 이곳에 일본인 학생을 위한 중학교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경희궁 서쪽 영역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웠다. 1911년 6월에는 궁궐 전체가 총독부로 이관되었다. 당시까지 경희궁에 남아있는 전각들은 1920년대에 헐려 매각되었다. 통감부 중학교는 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고 1925년에는 경기도로 이관되어 경성공립중학교가 되었다. 해방이후 이곳에 있었던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경희궁지는 민간 기업에 매각되었다. 그 후 비판적인 여론에 따라 서울시는 경희궁지를 다시 매입하고 1984년 공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1985년에 서울시립박물관 건립 추진 계획이 수립되었고 1988년 승인되면서 오랜 동안 논란이 거듭되었다. 서울시립박물관은 1993년 12월 15일 착공되어 1997년 12월 31일 준공되었다. 2001년 서울역사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02년 5월 21일 문을 열었다.[그림 39]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0/05/06 09:38 2010/05/06 09:38
Posted
Filed under 건축의 언저리에서(짧은글 모음)
* 2009년 11월에 발간된 '궁궐의 논물, 백년의 침묵'에 실린 원고임.

□ 경복궁(景福宮)

  1895년의 을미사변과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로 공식적인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은 1912년 총독부로 그 소관이 이관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근대 건축물이 들어선 것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개최되었던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施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로부터 시작되었다. 공진회를 위해 각종 진열관 등을 신축하면서 정전과 편전, 침전 일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공사의 편의를 위하여 궁성 동쪽 건춘문(建春門)에서 서쪽 영추문(迎秋門)에 이르는 횡단 도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약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내고 5,200여 평의 대지에 18개소의 진열관을 신축하였다. 정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석탑과 부도, 불상 등을 옮겨와 배열하였다. 이때 지어진 1호 진열관의 위치가 조선총독부 청사의 위치가 되었다.

공진회를 위해 건립하였던 미술품 진열관은 이후 총독부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공진회가 끝나자 일제는 곧바로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다. 광화문(光化門)에서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던 흥례문(興禮門) 및 그 좌우 행각과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협생문(協生門), 영제교 등이 있었던 근정문 앞 3만여 평 부지에 식민지 지배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1926년에 완공하였다. 또한 1923년 10월 5일에서 10월 24일까지는 근정전 뒤쪽에서 ‘조선부업품공진회’를 개최하였고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시정20년기념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5년에는 건청궁(乾淸宮)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병탄25주년기념박람회장’을 세웠다. 1939년에는 신무문(神武門) 밖 경복궁 후원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고, 같은 해에는 건천궁터에다 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갖는 위계성과 상징성을 훼손하기 위하여 일제는 다른 궁궐에서와는 달리 경복궁에서는 5년 단위로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를 기념하고 미화하는 박람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 또한 식민지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박물관과 미술관을 지어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수집된 유물들을 전시하면서 역사 왜곡과 식민 사관의 이식을 위한 왜곡된 이념 교육의 장으로 경복궁을 변모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 총독부 박물관

총독부 박물관은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후인 1915년 12월 1일 총독부 박물관으로 개관하였고 1916년부터 고적조사사업을 주관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고적조사사업은 평양의 낙랑유적 발굴과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신라와 가야 지역의 발굴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총독부 박물관에는 각종 고적 조사에 의한 수집품과 유물의 국고 귀속품, 사찰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전승공예품상설전시관과 학술원 등으로 사용되었고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총독부 박물관이 지어진 위치는 근정전 좌측 영역으로 원래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의 동궁지역에 해당된다. 원래 이 지역에는 중심 건물로서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資善堂)과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비현각(丕顯閣)이 있었고 그 주변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있었다. 이중 자선당은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팔려 ‘조선관’이라는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때 불타 없어졌다. 이후 자선당의 주춧돌이 오쿠라 호텔 구내 정원에 있었고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이것을 발견하고 반환 노력 끝에 1995년 12월 28일 경복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총독부 박물관은 벽돌조 2층 건물로 서양 고전주의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그림 27] 정면 중앙을 돌출시켜 주출입구를 형성하였고 코린트식 오더의 원기둥 2개를 하나의 단위로 반복시키고 있다. 돌출된 현관의 양쪽 모서리는 육중하게 처리하였고 곡선의 벽감(niche)을 파서 벽체의 육중함을 감소시키고 있다. 모서리 벽체와 6개의 코린트 오더 위쪽에는 고전주의 건축의 오더 형식에 따라 엔타블레쳐(Entablature)를 형성하였다. 좌우 대칭인 좌우측은 기단 위에 사각 벽기둥의 형식으로 단순화된 기둥 사이에 수직으로 긴 창을 설치하였다. 좌우측 부분도 모서리를 상대적으로 육중하게 처리하였고 벽기둥 위로 엔타블레쳐를 형성하였다. 그 위쪽에는 낮은 옥상 난간을 두었다. 좌우측을 중앙에 비해 낮게 처리하여 위계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림 28] 좌우측의 입면은 정면 좌우측의 입면과 동일한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주출입구에서 연결되는 중앙 홀 좌우에 전시장을 두었고 2층에도 전시장을 두었다. 건물의 앞쪽과 뒤쪽으로 넓은 서양식 정원을 형성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는 연면적 9,619평의 5층 건축물로 그 규모에서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전체를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해방 이전 한국근대건축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 1872-1914)가 초기 단계에서 설계를 진행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野村一郞) 등에 의해 설계가 완성되었고 일본 건설회사인 오쿠라구미와 시미즈구미(淸水組)에서 시공하였다. 1916년 6월 25일 착공하여 1923년 5월 17일 상량식을 거행하였고, 1926년 10월 1일, 10년 이상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공되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1916년에 착공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외장에 마감재로 사용된 석재는 동대문 밖 창신동 채석장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건축물 중앙의 대형 돔, 모서리의 사각 탑, 오더의 표현, 저층부의 러스티케이션 등에서 서양 고전주의 건축의 의장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사용되어 육중하고 기념비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다.[그림 29]

평면은 중정을 중심에 둔 日자 형태로 편복도를 따라 단위 공간을 병렬적으로 연속시켜 내부 공간을 구성하였다. 평면에서도 건축물 중앙 부분을 앞뒤로 돌출시키고 4개의 모서리 역시 돌출시켜 중심성과 위계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입면과 평면, 단면 등의 구성에서 서양 고전주의 건축에서 유래하는 비례체계를 적용하여 건축물을 계획하였다. 외관과 내부공간 구성의 측면에서 이 건축물은 양식주의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며 동시에 일본에 의해 양식주의 경향으로 지어진 관공서 건축이 갖는 그 상징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건축물이다.

1920년대 이전까지 관공서와 은행, 학교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양식주의 건축은 1920년대 초, 중반의 시기에 대규모의 관공서 건축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전개양상을 보이게 된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현재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는 경성부청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재판소 등의 대규모 관공서 건축에서 식민지 지배의 상징성과 권위성의 표현이 더욱 강조되어 나타났다. 양식주의 건축은 그러한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건축적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미군정청에서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앞마당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이 이곳을 인민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퇴각하면서 방화하여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950년 9월 26일 중앙청은 다시 한국군이 탈환하게 된다. 5.16 이후 복구하여 1982년까지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되었다. 1982년 3월부터 행정 부처들이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보수 공사를 거쳐 1986년 8월 21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91년부터 이 건물에 대한 철거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원형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고, 1995년 8월 15일 해방 50주년을 맞아 철거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완공된 지 70년 만인 1996년 철거가 완료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총독부 미술관

총독부 미술관은 향원정(香遠亭) 북쪽에 있는 건청궁 자리에 세워졌다. 곤녕합(坤寧閤)과 옥호루(玉壺樓) 등으로 구성된 건청궁은 신무문 남측에 위치한 건물로 1873년 고종이 건설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옥호루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는 박물관 현상설계를 1935년에 실시하였다. 박물관과 미술관, 과학관의 3동이 동시에 계획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현상설계로는 조선저축은행 현상설계 이후 2번째였다. 이때의 현상설계에는 88점의 작품이 응모했고 이중 일본인 야노(矢野 要)의 안이 당선되었다. 야노의 안은 서구식 근대 건물의 몸체에 동양풍의 목조 건축 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근대 건축물 위에 일본의 전통적인 지붕 형식을 올린 이러한 형식의 건물을 제관양식(帝冠樣式)이라고 불렀고, 서양의 근대건축에 대한 극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수주의에 기반한 군국주의가 극대화되는 과정이었다.

실제 지어지는 과정에서 당선안은 대폭 축소되었다. 우선 박물관과 과학관을 지어지지 않았고 미술관도 애초의 규모에서 축소되었다. 1939년 4월에 준공된 건물은 향원정을 향하여 남향하여 지어졌다.[그림 30] 벽돌조의 단층 건물로 지붕은 모임 지붕의 형태이다. 정면 주출입구를 돌출시켰고 좌우 대칭 형태로 지어졌다. 층고가 높아 반복적으로 배열된 창호는 고측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주출입구에서 연결되는 중앙 홀은 특별전을 위한 넓은 공간으로 계획하였고 각각의 전시실이 건물의 4면으로 연속되게 배열되었다. 이 건물은 1969년 10월 2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73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그림 31] 1998년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 지난 2007년 건청궁이 복원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기타 근대 건축물

경복궁 내에 지어졌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건축물은 관문각(觀文閣)이란 이름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문각은 건청궁 내에 있었고 고종의 서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명성왕후가 거처하였던 옥호루 뒤편에 있었다. 옥호루를 찍은 사진 뒤쪽에 부분적으로 나타난 근대 건축물이 관문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32] 3층 건물로 1901년 철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일제에 의해 건청궁이 헐리던 시기에 헐렸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건청궁이 복원되었으나 관문각은 복원되지 않았다. 을미사변 당시 이 건물에는 정관헌과 돈덕전 등을 설계하였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던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복궁과 연관된 또 다른 근대 건축물 중에 총독 관저가 있다. 총독 관저는 1939년 경복궁 신무문 밖의 경복궁 후원에 지어졌다. 이 지역에는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옥련정(玉蓮亭), 경농재(慶農齋) 등의 건물이 있었고, 경무대(景武臺)에서는 왕이 친히 군사훈련을 점검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1929년 5월 융문당 등의 건물을 헐어 목재는 매각하였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당시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고, 이름이 경무대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4.19이후 청와대에서 사용하였고 1995년 철거되었다. 총독 관저는 벽돌조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였다. 정면 중앙에 사각 기둥으로 지지되는 캐노피를 두었고 지붕은 경사 지붕으로 처리하였고, 창문 위쪽에는 차양을 돌출시켰다.[그림 3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경복궁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 현상설계를 통해 당선되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물로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등을 모사하여 집합시켰다. 현상설계가 발표되던 시기부터 논란이 많았으나 신축되어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구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로 이전하면서 1992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그림 34]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는 원래 선원전이 있던 자리로서 1932년 10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사당 박문사를 지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립고궁박물관은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면서 1996년 12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용산에 계획된 국립중앙박물관이 기공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면서 발생한 임시적인 상황이었다. 2004년 10월 17일 용산 이전을 위해 임시 휴관할 때까지 약 8년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2005년부터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이 이 건물로 옮겨오면서 국립고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분 개관하였다.[그림 35]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지붕은 전통적인 형식을 모방한 기와를 얹은 모임지붕 형태로 처리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0/04/29 09:43 2010/04/29 0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