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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에 발간된 '궁궐의 논물, 백년의 침묵'에 실린 원고임.

□ 경운궁(慶運宮)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후 1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1896년에서 1902년까지 계속된 경운궁의 수리와 중건 공사는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경운궁을 황제의 집무를 위한 궁궐에 걸맞게 그 격식을 갖추어가는 과정이었다. 경운궁에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또는 의양풍 건축물인 중명전과 환벽정, 정관헌, 구성헌, 돈덕전 등은 이 시기에 지어졌다. 같은 시기에 전통 건축 형식으로 창건된 건축물의 경우에는 그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있으나 이들 근대 건축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현재까지는 몇 가지 기록에 근거한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경운궁은 그 이름이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을 떠나지 않았다.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이후 1910년에는 석조전이 준공되었고, 1938년에는 이왕가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이들 근대 건축물의 신축 이외에도 각종 도로 공사 등을 통해 1960년대 말까지 덕수궁 영역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전각들은 사라져 갔다.

  ■ 중명전(中明殿)

경운궁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근대 건축물이 지어진 것은 현재 덕수궁 영역의 서쪽 외곽 미국대사관 너머에 위치한 중명전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경운궁 영역에 포함되었으나 1897년 정동 돌담이 생기면서 궁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알렌(Allen)이 1897년 9월 30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낸 ‘정동 조계지 안내도’[그림 3]에서 미국 공사관 좌측으로 현재의 중명전 위치는 ‘King's Library’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1899년 3월에 촬영된 ‘아펜젤러 사진첩’[그림 4]에는 미국 공사관 좌측에 ‘new royal library’라고 표현된 서양식 건축물이 나타나 있는데 이 건물이 고종의 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수옥헌(潄玉軒)이었다. 그러나 사진의 이 건물은 현존하는 중명전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901년 11월 16일 수옥헌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중명전은 화재 이후 신축된 건물[그림 5]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옥헌 대신 중명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1906년 이후의 일이다. 1904년 경운궁의 화재로 인해 전각들이 불에 타자 고종은 당시의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 후 덕수궁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고종이 수옥헌에 머무르는 동안 이 건물은 고종의 외국인 접견 장소와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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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옥헌에서 발생했던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05년 11월 17일에 있었던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이었다. 당시 특파대사 자격으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의 반대로 한일협약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1월 17일 경운궁과 수옥헌 주변에 무장한 일본 군대를 주둔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찬성하는 대신만을 따로 모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수옥헌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김으로서 대한제국이 사실상의 식민지 상태가 되는 역사적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고종은 을사늑약이 자신의 뜻에 반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고자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소집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등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고종이 이상설 등을 특사로 파견하기 위해 만난 곳도 이곳 중명전이었다.

고종이 떠난 이후 중명전은 1915년 정동구락부(Seoul Union)에 임대되어 서양인들의 클럽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 3월 12일 화재가 발생하여 벽체 만을 남기고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다. 이후 복구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다.[그림 6] 영친왕이 1963년 이방자 여사와 영구 귀국한 이후 1974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1977년 4월 개인 소유가 되었다가 1983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되었으나 방치되어 있었다. 2006월 9월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로 덕수궁에 포함되었다. 현재는 복원 공사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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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은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벽돌조 건축물로 지붕은 목조 왕대공 트러스 구조의 모임지붕 형태이다. 건립 초기의 사진을 보면 주출입구 위에는 사각 기둥으로 지지되는 경사 지붕의 캐노피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1층에는 넓은 아치창을 좌우로 3개씩 설치하여 아치가 연속된 입면을 형성하고 있다. 초기에는 완전한 형태의 아치창이었으나 1925년 화재이후 복구하면서 아치 부분을 벽돌로 막은 것으로 추정된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돌림띠를 둘렀고 2층에는 1층 창문 절반 정도 폭을 갖는 아치창이 설치되었고 지붕 중앙에 지붕창(Dormer window)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좌우측면과 배면에도 창문 배열의 차이는 있으나 정면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형식의 아치창과 지붕창이 사용되었다. 전체적으로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로 처리한 건축물이었다.

중명전 영역에는 또 하나의 근대 건축물인 환벽정(環碧亭)이 중명전과 러시아 공사관과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이 건물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수옥헌과 유사한 시기에 조금 더 작은 규모로 지어졌으며 정면이 러시아 공사관을 바라보고 있는 서향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은 선원전(璿源殿) 영역에 인접해 있고 서쪽은 러시아 공사관, 동쪽은 미국 공사관과 인접해 있었다. 남쪽으로는 수풍당(綏風堂)과 흠문각(欽文閣)이 있었다. 순종이 왕세자 시절 거처로 사용하였고, 왕세자 이은이 1907년 12월 5일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인 1910년대에 중명전 영역이 부분적으로 매각되고 해체되면서 환벽정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관헌(靜觀軒)

정관헌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머물면서 다과를 들며 음악을 감상하던 휴게용 건물로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관헌이라는 건물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고종황제가 현실 정치의 번잡스러움을 잠시 잊고 조용히 세상을 관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1년 2월 선원전에 있던 태조 영정을 정관헌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관헌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서 경운궁에서 건축공사가 한창이었던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동안 정관헌의 이름은 잠시 경운당(慶運堂)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목적이 휴게용 건물이었던 만큼 정관헌에서 국가적인 공식 행사가 열리지는 않았고 황제와 황태자의 영정을 그리는 일 등 황실의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4년 덕수궁이 야간 개장 되면서 일반 시민을 위한 휴게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차를 마시는 공간(喫茶室)으로 사용되었다. 정관헌은 2004년 2월 4일 등록문화재 제82호로 등록되었다가 사적 제124호로 관리되고 있는 덕수궁과 2중 관리되는 문제점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등록이 말소되어 덕수궁에 포함되었다.

덕수궁 영역의 중심부에서 약간 우측으로 북쪽 경계에 면하여 있는 정관헌은 뒤쪽 덕수궁 담장 너머로 성공회 성당과 인접해 있다. 앞쪽으로는 덕홍전(德弘殿)과 함녕전(咸寧殿) 사이에 단차가 있는 화단과 수목에 둘러싸여 조용한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정관헌이 지어지던 초기에는 주변에 더욱 많은 건물들이 정관헌을 둘러싸고 있었다. 현재 덕홍전 위치에는 경효전(景孝殿)이 있었고 경효전과 정관헌 사이에는 숙옹제(肅邕齊)와 함유제(咸有齊)가 있었다. 1930년대 덕수궁이 공원으로 개방되는 과정에서 함유제 등이 헐려 사라지면서 현재와 같은 공간 구성이 형성되었다.

정관헌은 단층의 팔작 지붕 건물로 건축물의 주된 구조체는 벽돌조의 벽체와 인조석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7] 정면과 좌우측면에 차양 칸처럼 설치된 바깥쪽 공간은 목조 기둥으로 지지되어 있다. 지붕은 목조 왕대공 트러스 구조로 현재는 방수시트 위에 아스팔트 슁글로 마감되어 있다. 화강석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정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주출입구를 만들었다. 바깥쪽 목조 기둥은 홈(fluting)을 파놓은 원기둥으로 주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이화를 새긴 복합주두의 형식이다. 주두 위쪽에 다시 꽃병을 새긴 사각 기둥을 올려 지붕을 지지하고 있다. 주각 사이에는 철제 주물로 소나무와 사슴, 박쥐 등의 모양을 만든 난간을 설치하였다. 주두 상부의 사각 기둥 사이에도 나무판을 투각하여 다양한 식물 문양과 박쥐 등의 모양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좌우측면도 정면과 동일한 수법으로 입면을 구성하였다. 반면 배면은 차양 칸 없이 벽돌 조적벽체로 처리하였고 중앙에는 출입문과 폭이 좁은 아치창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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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과 측면 안쪽에 세운 인조석 기둥은 투박하고 육중해 보이는 로마네스크식 기둥으로 사각형 주초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사각형의 주두를 올린 형태이다. 주두 위에 상인방을 얹고 그 위에 벽돌을 내쌓기 하여 수평 돌림띠를 만든 후 지붕을 얹었다. 차양 칸과 인조석 기둥으로 인하여 정관헌은 정면과 좌우측을 향해 열려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배면 쪽으로는 벽돌 벽으로 막힌 부속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정관헌의 이러한 공간 구성에 대해 변형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30년대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정관헌의 현판이 걸려있는 사진[그림 8]에는 내부의 인조석 기둥이 없고 이 부분이 벽돌벽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진에 근거한다면 초기의 정관헌은 4면이 모두 벽돌벽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에 팔작지붕을 얹고, 정면과 양측면에 차양 칸을 덧붙인 형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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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헌(九成軒)과 돈덕전(惇德殿)

구성헌은 현재의 석조전 바로 뒤쪽에 있었던 근대 건축물로 이 건물은 돈덕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세관으로 사용되었고 돈덕전이 건립된 이후에는 고종의 외국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펜젤러 사진첩’[그림 9]에 영국영사관 및 미국영사관과 함께 건물의 측면 일부가 나타나 있고, 이 건물에 ‘custom bldg’라는 주기가 붙어 있어 세관 건물로 사용되었고 수옥헌과 유사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1904년 경운궁 지도에서 ‘Former Custom House’라고 표현된 10번 건물이 구성헌인 것으로 판단된다.[그림 10] ‘New Unfinished Palace’라고 표현된 6번 건물을 구성헌이라고 본 기존 연구의 추정보다는 10번 건물을 구성헌으로 보고 6번 건물은 당시 공사 중이었던 석조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구성헌은 석조전이 공사 중이던 1900년대 후반에 석조전 부지에 편입되면서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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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헌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영역 안에 위치하였고 우측의 회극문(會極門)을 통해 준명당(浚明堂) 뒤쪽 영역으로 연결되고, 좌측의 집하문(緝嘏門)을 통해 경운궁 밖으로 나가면 북쪽의 돈덕전 영역과 영국영사관 영역으로 연결되는 위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구성헌 관련 자료는 거의 없다. 1904년 화재 이전의 중화전을 찍은 사진에 구성헌이 흐릿하게 나타나 있어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그림 11] 규모는 크지 않으나 벽돌조 2층 건축물로 지붕은 박공지붕으로 판단된다. 전면으로 1층과 2층에 반원 아치가 연속된 아케이드가 있고 난간이 있는 베란다 형식의 건물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아펜젤러 사진첩을 보면 측면 역시 정면과 동일한 아케이드 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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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헌의 북서쪽으로 미국영사관과 영국영사관 사이에 돈덕전 영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쪽으로는 선원전 영역과 연결되어 있었고 남쪽으로는 미국영사관과 경운궁 담장 사이로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이 지역은 알렌이 1897년에 작성한 정동 조계지 안내도에 ‘Korlan Customs Compound’라고 표현되어 있고, 1901년 지도에는 ‘Customs’라고 표현되어 있어 이곳이 세관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그림 12] 따라서 돈덕전은 세관 기지 용도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9년 3월에 촬영된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고 1904년 화재 시에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1904년 이전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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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이 세관 용도로 사용되었던 기간은 길지 않았고 주로 고종과 관련된 행사에 주로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행사는 1907년 8월 27일에 있었던 순종 황제의 즉위식이었다. 고종의 양위로 황제에 오르게 된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융희(隆熙) 연호를 선포하였다. 이후 기록을 보면 1912년 고종이 돈덕전에서 신년하례를 받고 활동사진을 관람했고, 1913년과 1915년에는 고종의 탄신일 행사를 돈덕전에서 개최하였다. 주로 고종 황제가 사용하였던 돈덕전은 1922년 신문로와 선원전 구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된 이후 1920년대 중, 후반사이에 헐렸다.

돈덕전은 벽돌조 2층 건물로 지붕은 경사가 급한 모임 지붕으로 처리되었고 측면에 뾰족한 원추형의 탑(Turret)을 올린 것이 특징적이다.[그림 13] 경사진 지붕에는 지붕창을 설치하였다. 1층과 2층 모두 벽돌 기둥 사이에 아치를 올려 아케이드를 형성하였다. 벽돌 기둥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배꽃 문양의 장식을 형성하여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하였다. 기둥 사이 난간에도 배꽃 문양의 장식으로 처리하여 구성헌과 유사한 베란다 스타일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구성헌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건축물로 남향하고 있었다. 돈덕전에 대한 자료도 많지 않으나 몇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사진 중 하나가 돈덕전 2층 베란다에 앉아 있는 고종 황제의 사진[그림 14]이다. 이 사진은 한때 아관파천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고종 황제를 찍은 사진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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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바찐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경운궁에 지어졌던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당시 대한제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credin Sabatin)으로 알려져 있다. 1860년경 러시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사바찐은 1883년 서울에 왔다. 사바찐은 이때부터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인들이 대한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약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렀다. 사바찐의 건축 활동으로 알려진 것은 1885년에 준공된 러시아 공사관이 처음이었다. 사바찐이 설계한 이 건물은 당시 제정 러시아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벽돌조 단층 건물로 3층 높이의 탑과 함께 정면과 측면에 설치된 아케이드가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사바찐은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사바찐은 경운궁에 지어지게 되는 많은 양관 건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은 많은 왕실 건축물 신축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 1903년에 지어진 손탁호텔 등에도 참여하였다. 러시아 예술학자, 끄라세이 느이쉬꼬프 아 에프가 김정동 교수에게 보낸 사바찐에 대한 글을 보면 1883년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사바찐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유럽식 정주지의 설계와 관청건물의 건축을 맡아 달라는 초빙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고종이 그리고 어떻게 사바찐을 알게 되었고 그를 초빙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알기 어렵다. 다만, 우리 근대초기에 사바찐 만큼 황실과 연관된 많은 근대 건축물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외국인 건축가는 없었다.

■ 석조전(石造殿)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에 지어졌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대규모의 건축물인 석조전은 서양식 궁궐 건축물로 준명당 좌측과 구성헌 남측의 공지에 지어졌다. 좌측으로 덕수궁 담장에 인접해 있고 담장 너머로 미국영사관에 인접해 있었다. 석조전은 정남향에 가깝게 배치되어 정전인 중화전과는 다른 축을 형성하였다. 신축공사 중 구성헌과 집하문이 석조전 부지로 흡수되면서 헐렸고, 건축물 완공 후 정원 공사 과정에서 중화전 행각이 헐려나갔다. 석조전은 1900년 경 당시 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Sir. John McLeavy Brown, 白卓安)이 발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설계자 역시 영국인 하딩(Harding. G. R.)이었다. 시공은 일본의 오쿠라구미(大倉組)가 했으며, 심의석(沈宜錫), 사바찐,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데이비슨(H. W. Davidson) 등이 공사를 감독했다. 건물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으며, 공사는 영국의 크리톨(Crittall)과 메이플(Maple)사가 맡아서 하였다. 1909년(융희 3년)에 완공되었다는 기록과 1910년 12월 이후에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완공시기가 정확하지 않으나 완공 이후에도 정원공사가 계속되어 1913년에 끝난다.

완공 후 석조전은 고종이 외국인을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913년에는 순종이 석조전에서 종친 및 고관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있고 1917년 고종 탄신일 행사가 있었다. 1918년 1월 13일에는 왕세자 귀국 축하 만찬회가 개최되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인 일제 후반기 석조전은 주로 미술관 용도로 사용된다. 1931년 10월 1일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처음으로 일본미술품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1933년 10월에는 석조전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1938년 서관이 준공되면서 함께 이왕가미술관이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임시정부가 임시정무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1946년 3월 20일에는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1948년에는 UN한국임시위원단이 이곳에서 회의를 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는 맥아더가 석조전에 잠시 본부를 둔 적이 있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73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92년부터 2004년까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2004년 2월 4일 등록문화재 제80호로 등록되었다가 다시 등록이 말소되어 사적 124호로 덕수궁에 포함되었다.

석조전은 1개 층 높이의 기단부를 포함하면 지상 3층 규모의 석조 건축물로 우리나라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 중 서양고전주의 건축 양식이 가장 온전히 구현된 건축물이다.[그림 15] 기단부는 석재를 거칠게 마감(Rustication)하였고 정면 중앙에 높은 계단과 박공면(Pediment)이 돌출된 열주가 있는 현관(Portico)을 두었다. 현관에는 이오니아식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좌우측에는 이오니아식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위계를 두었다.[그림 16] 정면 중앙의 박공면에는 배꽃 문양을 새겨 황실 건축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정면 좌우측과 건물의 좌우측면에는 베란다를 두었다. 이오니아식 주두와 코니스의 덴틸 장식 등이 섬세한 편이다. 옥상 난간에는 꽃병 모양을 돌로 조각하여 올렸다. 건물의 좌우측에도 별도의 출입구를 두었고 정면과 동일하게 박공면을 돌출시켜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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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부에 해당하는 1층 부분은 시중인들의 거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과 홀로 구성되었으며 3층은 황제, 황후의 침실 및 거실, 욕실, 담화실 등으로 구성되었고 로코코 풍으로 장식되었다. 전형적인 유럽 상류층 주거 건축의 구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미술관으로 개조되면서 2층 공간은 3층까지 개방된 중앙 홀을 중심으로 가로 방향의 복도를 형성하여 전면 좌우에 전시실을 두었고 복도 건너편 건물의 뒤쪽으로 실들을 배치하였다. 3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은 복도의 양쪽 좌우에 두었다. 3층 역시 2층 홀의 상부 개방공간을 제외하고 복도를 두어 건물의 앞쪽과 뒤쪽이 구분되는 공간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석조전 앞의 정원은 건물과 동일하게 서양식 정원 설계의 개념에 따라 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유럽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과 동남아의 유럽 식민지에서 형성된 베란다 양식이 결합된 형식의 건축물이다.

  ■ 이왕가미술관 및 기타 근대 건축물

현재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석조전 서관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이왕가미술관으로 1938년 완공된 건물이다.[그림 17] 1936년 이왕직에서 석조전에 잇대어 건물을 짓고 창경궁 박물관의 소장품을 옮겨오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던 일본인 건축가 나까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설계하였다. 1938년 6월 석조전과 합하여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하였고, 그해 9월 건물 앞쪽으로 분수대가 만들어졌다. 덕수궁 담장을 등지고 석조전 앞 정원을 향해 동향하여 지어졌다. 1986년까지 석조전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문화재관리국,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국립국어연구원 등으로 사용되었고 1998년 12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4년 2월 4일 등록문화재 제81호로 등록되었다가 사적 124호인 덕수궁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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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과 유사하게 1층의 기단부는 석재를 거칠게 마감하여 처리하였고 높은 계단을 두어 주출입구를 만들고 6개의 코린트 오더 원기둥을 배열하였다.[그림 18] 기단부와 기단 윗부분 모두 동일한 크기의 수직 창을 동일한 위치에 반복시켜 매우 단순한 입면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건축물의 상단부에는 수평의 돌림띠를 두었다. 1층은 사무실 및 관리실로 사용되고 있다. 2층은 중앙에 홀을 두고 좌우로 관람실을 배치하였다. 홀 양측으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실을 배치하였고 배면 쪽에 귀빈실과 계단실을 두었다. 우측 단부에는 계단실과 함께 3층에서 석조전과 연결되고, 좌측 단부에는 2층과 3층 모두 휴게실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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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건축물 이외에도 경운궁에는 더 많은 근대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운궁의 정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우측에는 군사용 건물인 원수부(元帥府)가 있었다.[그림 19] 벽돌조 2층의 박공지붕 건물로 1904년 경운궁 지도에는 ‘Board of Generals’라고 표현되어 있다. 건축물의 용도에 걸맞게 단순하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이 건물은 도로 확장과정에서 헐린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그림 20]을 보면 대한문(大漢門)과 포덕문(布德門) 뒤쪽으로 서양식 건축물로 판단되는 건축물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건축물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없어 덕수궁 내에 어떤 근대 건축물들이 있었는지 전모를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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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5 09:57 2010/04/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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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에 발간된 '궁궐의 논물, 백년의 침묵'에 실린 원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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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현 언덕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오른 명동성당[그림 1]의 첨탑과 정동 언덕 위에 세워진 러시아 공사관[그림 2]의 위용을 보여주는 옛 사진들에서 우리는 근대 초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식 건축물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게 된다. 낮게 깔린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진 전통적 도시 경관에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이 낯선 건축물들이 연출하는 새로운 경관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충격적인 광경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외세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스러져가던 국가의 위태로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그 충격은 더욱 컷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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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그 건축물이 갖고 있는 본래의 용도와 기능에 따른 가치 뿐만 아니라 그 건축물이 지어지고 사용되는 동안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부가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특히 궁궐에 들어선 근대 건축물은 개별적인 건축물 자체가 갖는 건축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 건축물이 한국의 전통사회와 전통건축을 대표하는 궁궐 건축과 대비되어 지어졌다는 그 상대적 관계에서 더 많은 부가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중화전에 대비되는 석조전이나 근정전에 대비되는 조선총독부의 모습은 명동성당이나 러시아 공사관 만큼의 커다란 충격으로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석조전이나 조선총독부 건물과 같은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궁궐에 들어섰던 근대 건축물들은 그 쓰임새와 양식은 물론 그 성격과 의미에서도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 등의 대표적 궁궐들은 근대의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그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변형되고 훼손되어 왔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근대 건축물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는 일제 식민지 지배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고 각종 박람회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기념하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지어졌다.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이 만들어지면서 각종 동물의 우리와 식물 온실, 장서각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물론 일제에 의해 지어진 경복궁과 창경궁의 근대 건축물과는 다른 성격의 근대 건축물도 있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조성한 경운궁에 세워졌던 중명전과 정관헌, 돈덕전, 석조전 같은 건축물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에 근대 건축물을 채워 넣는 일이 일제강점기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일제가 세운 근대 건축물을 철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축물들을 채워갔던 것이다. 경복궁에는 70년대에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이 들어섰고, 10여년 전에는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이 신축되었다. 경희궁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새로운 건축물들이 신축되던 당시에는 그 상황마다 나름대로의 타당한 논리가 있었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신축공사가 진행되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그 당시의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었다. 앞으로 우리 궁궐의 모습은 또 다시 어떻게 변모하게 될까? 1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궁궐에 들어선 근대 건축물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2010/04/08 10:14 2010/04/0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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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청 본관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16호(2002년 5월 31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행정자치부, 전라남도(동구청장)
3. 설계자 : 김순하(金舜河), 시공자 : 대창토목주식회사(大倉土木株式會社)
4. 건립연도 : 1930년 12월 5일(준공연도)
5. 면적 : 건축면적/600㎡, 연면적/1,667㎡, 대지면적/1,062㎡
6. 위치 : 광주광역시 광산동 13
7. 현용도 : 공공업무시설(현 전라남도청)
8. 구조 : 적벽돌 조적조(지상 3층)
9. 참고문헌 : 조선건축회, 朝鮮と建築, 193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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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를 방문해보지 않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금남로’라는 이름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금남로라는 이름이 광주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그리고 한국 현대사와 뗄 수 없는 어떤 상징성을 갖는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금남로의 시작점에 하얀색 3층 건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분수대 넘어 금남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 건물이 전라남도청 본관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광주’라는 상징적 의미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금남로이고 전남도청 본관 앞 광장이다. 전남도청은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기도 하지만 광주광역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일제강점기로부터 7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광주․전남과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의 증언자가 되어 왔다.
전남도청 본관 건물이 준공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 잡지(1931년 2월호)에 실린 기사를 보면 건립 당시 전남도청 건물은 벽돌조 2층 건물로 바닥과 계단 등에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였고 외장은 붉은 벽돌과 화강석, 인조석 등으로 마감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준공 당시 건축면적은 126.5평이었고 연면적은 262평이었다. 공사기간은 대략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1930년 6월 23일에 기공하였고 같은 해 12월 5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3만 3천원이 소요되어 평당 공사비는 120원 정도였다. 건물의 시공은 일본 건설 회사였던 대창토목주식회사(大倉土木株式會社)에서 담당하였다.
전남도청 본관 건물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재판소(1928년)나 충남도청 본관(1932년)과 같은 동시기에 지어졌던 관공서 건물과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다. 건물 정면 중앙의 출입구는 기하학적인 요철을 둔 사각 기둥의 캐노피로 처리하였고, 건물의 중앙 부분을 좌우측 보다 높게 하고 좌우 대칭으로 설계하여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건물의 좌우측 부분이 단순한 수직창으로 처리된 것과는 달리 현관 위쪽에는 3개의 아치창을 장식적으로 처리하여 좌우측의 날개 부분과 구별되는 위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설계 수법은 건물에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한 관공서 건물의 전형적인 수법들이었다.
전남도청 본관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2층의 높이에 붉은 벽돌의 외관과 화강석 및 인조석의 장식이 대조를 이루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직후 이 건물은 백색 도료로 도색되어 준공 당시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1975년 3층으로 증축되었고 신축건물과 연결되면서 확장되었다. 증축된 3층 부분은 건축가 김태만이 설계한 것으로 1, 2층에 비해 단순화되기는 하였으나 초기 설계와 유사한 형식이 사용되었다.
“조선과 건축”에는 설계자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지방의 관공서 건물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방 관청에서 직접 설계하였다. 전남도청 본관 역시 전라남도 회계과 영선계에서 설계하였고, 당시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했던 사람이 김순하(金舜河, 1901∼1966)라는 한국인 건축가였다. 김순하는 일제강점기 한국 내에서 최고의 공업 교육기관이었던 3년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1925년에 졸업하고 1933년 총독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전라남도에서 근무하였다. 전라남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김순하는 전남도청 본관 건물 뿐만 아니라 현재 광주시 유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남도청 회의실을 설계한 대표적인 한국인 건축가였다.
전남도청 본관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가치와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16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향후 백색 도료를 벗겨내어 본래의 외관을 되찾을 수 있다면 소중한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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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44 2009/04/16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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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교회 및 애양병원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32호, 33호(2002년 5월 31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대한예수교 장로회 애양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애양교회)
3. 설계자 : 미상
4. 건립연도 : 1926년
5. 위치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
6. 현용도 : 종교시설 및 전시시설
7. 구조 : 교회(석재 조적조, 지상 1층), 병원(석재 조적조, 지상 2층)
8. 참고문헌 :
http://www.wlc.or.kr/
      전남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사업보고서, 전라남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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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교회는 우리나라 의료 선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소중한 건물이다. 애양교회 건물이 신축된 것은 1926년 이지만, 그 연원은 19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4월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트(Willey H. Forsythe) 의료 선교사가 광주로 가던 중,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던 한센병 환자를 광주 제중원 벽돌 가마터에서 치료하게 된 것이 서양 의학에 의한 나환자 치료의 효시였다. 이것이 미국인 윌슨(Robert M. Wilson) 의료 선교사에 의해 1911년 4월 25일 당시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설립된 광주 나병원으로 계승되었고 1913년에는 최초로 나병원 교회가 설립되었다.
광주에서 번창하던 나병원과 교회는 1926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대로 옮겨오게 된다. 이때 현재의 애양교회 건물이 신축되었다. 또한 애양교회 맞은편에 현재 WLC(Wilson Leprosy Center)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등록문화재 33호인 애양병원도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애양병원은 당시에는 비어울프 나병원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935년 3월 15일 애양원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애양병원 건물은 1999년 12월 역사관으로의 전용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 6월 24일 WLC역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현재 역사관에는 의료기구와 사진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어 당시의 의료 상황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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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공항과 남해의 광양만에 인접한 현재의 애양병원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애양교회과 그 주변에는 현재까지도 애양병원과 관련된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구 애양병원 건물을 비롯하여 1953년 신축되어 한성신학교로 사용되다가 현재 수양관으로 사용되는 토플하우스(Topple House)를 비롯한 다수의 근대건축물이 산재되어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다.
여수 애양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지만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지던 많은 건축물과는 구별되는 석조 1층 건물로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 애양교회 뿐만 아니라 애양병원과 주변에 산재한 근대건축물들이 동일한 재료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어져 동질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일반적인 교회 건축과 유사하게 끝이 뾰족해지는 첨두형 아치창을 둘렀고 정면 좌측으로 사각탑을 쌓고 그 위에 탑과 십자가를 올렸다. 지붕은 함석을 얹은 박공지붕으로 마감되었다.
애양교회는 잦은 증축과 개축으로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으나 건물의 기본적인 골격과 개구부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35년에 예배당을 재건하였고, 1979년 개축시 경사로와 계단을 설치하였다. 1980년 이후 목조였던 보와 기둥을 철근콘크리트로 개조하였고 층고를 높이기 위해 벽면 상부에 석재를 4단 정도 더 쌓아 올렸다.
애양교회는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애양병원 건물과 함께 서양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건물로서 우리나라 의료 선교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32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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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40 2009/04/16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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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61호(2003년 6월 30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3. 설계자 : 미상
4. 건립연도 : 1920년대
5. 면적 : 건축면적/97㎡, 연면적/97㎡
6. 위치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570-6
7. 현용도 : 업무시설(현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
8. 구조 : 지상 1층
9. 참고문헌 : 宇津木初三郞, 김제발전사, 1934.
      근대문화유산 목록화 및 조사보고서, 전라북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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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자리 잡은 전라북도 김제시는 만경평야와 김제평야 등의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이루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쌀농사를 중심으로 한 전국 최대의 미작지대를 형성하여 왔다.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농장을 설립하고 대규모로 쌀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본에 의한 토지 침탈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직후부터였다. 또한,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토지 침탈은 더욱 빠른 속도로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 침탈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이 전북지역으로 이미 1900년대 초부터 대규모 농장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현재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동안 전라북도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던 일본인 대지주 중 하나인 하시모토(橋本)의 농장 사무실로 지어졌다. 하시모토는 1906년 군산을 통해 전라북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1911년 동진강 일대의 개간지를 불하받아 개간에 착수하여 이듬해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 후 이곳 죽산으로 거주지를 이전하면서 1916년 5월부터 농장 경영을 시작하였다. 1931년 3월에는 죽산면 죽산리 농장을 자본금 50만원의 법인 ‘주식회사 하시모토 농장’으로 개칭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농장 사무실의 건립년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하시모토 농장의 연혁에 비추어볼 때 법인을 설립한 1931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일본인이 서양식 석조 건축을 모방하여 지은 단층 건물로 외벽의 하부에는 인조석을 붙였고 상부는 요철을 두어 장식적으로 처리하였다. 지붕 처마의 아래쪽에도 서양의 고전 건축에서 사용되는 장식을 모방하고 있다. 지붕은 2단으로 경사진 맨사드(mansard)형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었고 정면과 배면에는 각각 2개씩의 창문을 두었다. 정면 중앙에는 주출입구를 돌출시켰고 그 좌우에 2개씩의 수직 창을 두어 대칭적인 정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는 넓은 사무공간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좌측에 작은 방 2개를 두었다. 이 방들은 임원실과 숙직실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감내해야 했던 수탈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임과 동시에 전라북도의 근대사가 갖는 지역적 특수성을 대변해주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61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비록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일지라도 그것이 역사로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건축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글이나 말로 배우는 역사를 넘어서서 보다 구체적으로 과거와 만날 수 있는 공간적 경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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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26 2009/04/16 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