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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플로리다 템파 시내의 구도심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이보시티는 19세기 후반부터 시가(Cigar) 산업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도시의 번영과 쇠퇴, 그리고 재생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이탈리아인 클럽과 쿠바인 클럽 등 몇 개의 주요 건축물이 전체적인 경관에서 랜드마크로서 기능하고 있고 2000년대 이후 상공회의소와 시에 의해 개발된 센트로 이보(Centro Ybor)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적 중심 영역이 형성되고 있다. 넓은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건축물이 산재하여 역사적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벽돌조 1-3층 정도의 건축물로 개별 건축물의 가치는 높지 않으나 건축물들에 의해 형성된 가로 조직과 도시 경관의 측면에서 건축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 개별 건축물은 대부분 상업시설로서 사용되고 있어 그 활용이 가능하다. 예술인들의 개인 작업 및 갤러리에서 식당, 술집 등의 상업적 소비문화가 중심이 되고 있다. 건축물 자체가 갖는 재료와 층수 등에서 동질성을 확보하고 있고, 상업적 경관의 가로등, 가로수, 철재 난간 등의 디자인이 동시에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요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을 돌아보면서 군산 생각이 자꾸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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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티의 창립자 빈센트 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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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시가공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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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보시티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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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공장 작업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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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티 역사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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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Ybor, 2000, Development Design Group, Alfonso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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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ni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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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or City State Museum : 19세기에 지어진 작은 빵집을 개수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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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or City State Museum 내부
도시의 역사를 담는 박물관을 굳이 거창하게 지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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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티와 템파 다운타운을 왕복하는 시내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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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ione Italiana : 이탈리아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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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rculo Cubano de Tampa, 1918, M. Leo Elliott : 쿠바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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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Espanol : 에스파니아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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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or Square,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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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th Ave.

2009/05/12 22:56 2009/05/1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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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청 본관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16호(2002년 5월 31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행정자치부, 전라남도(동구청장)
3. 설계자 : 김순하(金舜河), 시공자 : 대창토목주식회사(大倉土木株式會社)
4. 건립연도 : 1930년 12월 5일(준공연도)
5. 면적 : 건축면적/600㎡, 연면적/1,667㎡, 대지면적/1,062㎡
6. 위치 : 광주광역시 광산동 13
7. 현용도 : 공공업무시설(현 전라남도청)
8. 구조 : 적벽돌 조적조(지상 3층)
9. 참고문헌 : 조선건축회, 朝鮮と建築, 193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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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를 방문해보지 않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금남로’라는 이름이 낯설게 들리지 않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금남로라는 이름이 광주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그리고 한국 현대사와 뗄 수 없는 어떤 상징성을 갖는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금남로의 시작점에 하얀색 3층 건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분수대 넘어 금남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 건물이 전라남도청 본관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광주’라는 상징적 의미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금남로이고 전남도청 본관 앞 광장이다. 전남도청은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기도 하지만 광주광역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일제강점기로부터 7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광주․전남과 연관된 역사적 사건들의 증언자가 되어 왔다.
전남도청 본관 건물이 준공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 잡지(1931년 2월호)에 실린 기사를 보면 건립 당시 전남도청 건물은 벽돌조 2층 건물로 바닥과 계단 등에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였고 외장은 붉은 벽돌과 화강석, 인조석 등으로 마감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준공 당시 건축면적은 126.5평이었고 연면적은 262평이었다. 공사기간은 대략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1930년 6월 23일에 기공하였고 같은 해 12월 5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3만 3천원이 소요되어 평당 공사비는 120원 정도였다. 건물의 시공은 일본 건설 회사였던 대창토목주식회사(大倉土木株式會社)에서 담당하였다.
전남도청 본관 건물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재판소(1928년)나 충남도청 본관(1932년)과 같은 동시기에 지어졌던 관공서 건물과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다. 건물 정면 중앙의 출입구는 기하학적인 요철을 둔 사각 기둥의 캐노피로 처리하였고, 건물의 중앙 부분을 좌우측 보다 높게 하고 좌우 대칭으로 설계하여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건물의 좌우측 부분이 단순한 수직창으로 처리된 것과는 달리 현관 위쪽에는 3개의 아치창을 장식적으로 처리하여 좌우측의 날개 부분과 구별되는 위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설계 수법은 건물에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기 위한 관공서 건물의 전형적인 수법들이었다.
전남도청 본관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2층의 높이에 붉은 벽돌의 외관과 화강석 및 인조석의 장식이 대조를 이루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직후 이 건물은 백색 도료로 도색되어 준공 당시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1975년 3층으로 증축되었고 신축건물과 연결되면서 확장되었다. 증축된 3층 부분은 건축가 김태만이 설계한 것으로 1, 2층에 비해 단순화되기는 하였으나 초기 설계와 유사한 형식이 사용되었다.
“조선과 건축”에는 설계자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지방의 관공서 건물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방 관청에서 직접 설계하였다. 전남도청 본관 역시 전라남도 회계과 영선계에서 설계하였고, 당시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했던 사람이 김순하(金舜河, 1901∼1966)라는 한국인 건축가였다. 김순하는 일제강점기 한국 내에서 최고의 공업 교육기관이었던 3년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1925년에 졸업하고 1933년 총독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전라남도에서 근무하였다. 전라남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김순하는 전남도청 본관 건물 뿐만 아니라 현재 광주시 유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남도청 회의실을 설계한 대표적인 한국인 건축가였다.
전남도청 본관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가치와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16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향후 백색 도료를 벗겨내어 본래의 외관을 되찾을 수 있다면 소중한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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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44 2009/04/16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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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교회 및 애양병원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32호, 33호(2002년 5월 31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대한예수교 장로회 애양교회(대한예수교 장로회 애양교회)
3. 설계자 : 미상
4. 건립연도 : 1926년
5. 위치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
6. 현용도 : 종교시설 및 전시시설
7. 구조 : 교회(석재 조적조, 지상 1층), 병원(석재 조적조, 지상 2층)
8. 참고문헌 :
http://www.wlc.or.kr/
      전남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사업보고서, 전라남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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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교회는 우리나라 의료 선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소중한 건물이다. 애양교회 건물이 신축된 것은 1926년 이지만, 그 연원은 19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4월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트(Willey H. Forsythe) 의료 선교사가 광주로 가던 중,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던 한센병 환자를 광주 제중원 벽돌 가마터에서 치료하게 된 것이 서양 의학에 의한 나환자 치료의 효시였다. 이것이 미국인 윌슨(Robert M. Wilson) 의료 선교사에 의해 1911년 4월 25일 당시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설립된 광주 나병원으로 계승되었고 1913년에는 최초로 나병원 교회가 설립되었다.
광주에서 번창하던 나병원과 교회는 1926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대로 옮겨오게 된다. 이때 현재의 애양교회 건물이 신축되었다. 또한 애양교회 맞은편에 현재 WLC(Wilson Leprosy Center)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등록문화재 33호인 애양병원도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애양병원은 당시에는 비어울프 나병원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935년 3월 15일 애양원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애양병원 건물은 1999년 12월 역사관으로의 전용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 6월 24일 WLC역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현재 역사관에는 의료기구와 사진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어 당시의 의료 상황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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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공항과 남해의 광양만에 인접한 현재의 애양병원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애양교회과 그 주변에는 현재까지도 애양병원과 관련된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구 애양병원 건물을 비롯하여 1953년 신축되어 한성신학교로 사용되다가 현재 수양관으로 사용되는 토플하우스(Topple House)를 비롯한 다수의 근대건축물이 산재되어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다.
여수 애양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지만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지던 많은 건축물과는 구별되는 석조 1층 건물로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 애양교회 뿐만 아니라 애양병원과 주변에 산재한 근대건축물들이 동일한 재료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어져 동질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일반적인 교회 건축과 유사하게 끝이 뾰족해지는 첨두형 아치창을 둘렀고 정면 좌측으로 사각탑을 쌓고 그 위에 탑과 십자가를 올렸다. 지붕은 함석을 얹은 박공지붕으로 마감되었다.
애양교회는 잦은 증축과 개축으로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으나 건물의 기본적인 골격과 개구부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35년에 예배당을 재건하였고, 1979년 개축시 경사로와 계단을 설치하였다. 1980년 이후 목조였던 보와 기둥을 철근콘크리트로 개조하였고 층고를 높이기 위해 벽면 상부에 석재를 4단 정도 더 쌓아 올렸다.
애양교회는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애양병원 건물과 함께 서양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건물로서 우리나라 의료 선교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32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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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40 2009/04/16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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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61호(2003년 6월 30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3. 설계자 : 미상
4. 건립연도 : 1920년대
5. 면적 : 건축면적/97㎡, 연면적/97㎡
6. 위치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570-6
7. 현용도 : 업무시설(현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
8. 구조 : 지상 1층
9. 참고문헌 : 宇津木初三郞, 김제발전사, 1934.
      근대문화유산 목록화 및 조사보고서, 전라북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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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자리 잡은 전라북도 김제시는 만경평야와 김제평야 등의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이루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쌀농사를 중심으로 한 전국 최대의 미작지대를 형성하여 왔다.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농장을 설립하고 대규모로 쌀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본에 의한 토지 침탈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직후부터였다. 또한,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토지 침탈은 더욱 빠른 속도로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 침탈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이 전북지역으로 이미 1900년대 초부터 대규모 농장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현재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동안 전라북도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던 일본인 대지주 중 하나인 하시모토(橋本)의 농장 사무실로 지어졌다. 하시모토는 1906년 군산을 통해 전라북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1911년 동진강 일대의 개간지를 불하받아 개간에 착수하여 이듬해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 후 이곳 죽산으로 거주지를 이전하면서 1916년 5월부터 농장 경영을 시작하였다. 1931년 3월에는 죽산면 죽산리 농장을 자본금 50만원의 법인 ‘주식회사 하시모토 농장’으로 개칭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농장 사무실의 건립년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하시모토 농장의 연혁에 비추어볼 때 법인을 설립한 1931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일본인이 서양식 석조 건축을 모방하여 지은 단층 건물로 외벽의 하부에는 인조석을 붙였고 상부는 요철을 두어 장식적으로 처리하였다. 지붕 처마의 아래쪽에도 서양의 고전 건축에서 사용되는 장식을 모방하고 있다. 지붕은 2단으로 경사진 맨사드(mansard)형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었고 정면과 배면에는 각각 2개씩의 창문을 두었다. 정면 중앙에는 주출입구를 돌출시켰고 그 좌우에 2개씩의 수직 창을 두어 대칭적인 정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는 넓은 사무공간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좌측에 작은 방 2개를 두었다. 이 방들은 임원실과 숙직실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감내해야 했던 수탈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임과 동시에 전라북도의 근대사가 갖는 지역적 특수성을 대변해주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61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비록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일지라도 그것이 역사로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건축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글이나 말로 배우는 역사를 넘어서서 보다 구체적으로 과거와 만날 수 있는 공간적 경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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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26 2009/04/16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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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 2004년 문화재청에서 발간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1"에 기고했던 원고임.

 
□ 건축개요
1. 등록번호 : 제29호(2002년 5월 31일 등록)
2. 소유자(관리자) : 조흥은행(목포시장)
3. 설계자 : 미상
4. 건립연도 : 1929년 11월 11일
5. 면적 : 연면적/516㎡, 대지면적/1,409㎡
6. 위치 : 전라남도 목포시 상락동 1가 10-2
7. 현용도 : 업무시설
8. 구조 : 조적조(지상 2층)
9. 참고문헌 : 전남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사업보고서, 전라남도, 2003.
이한구, 일제하 한국기업설립 운동사, 청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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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행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설립된 민족계 은행이었다. 광주와 목포의 유력한 한국인 자본가 24명이 참여한 호남은행은 광주를 본점으로 하였으며 설립 당시 자본금은 150만원이었다. 호남은행의 설립은 설립 당시 전무취체역이었던 현준호(1889∼1950)가 주도하였는데 그는 1925년 대표취체역에 취임하게 된다. 현준호의 아버지인 현기봉 역시 목포창고금융주식회사, 해동물산주식회사 등을 설립한 전남의 대표적인 대지주이자 기업가였다.
1889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현준호는 1906년 담양 창평 영학숙에서 수학하면서 근대기 호남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송진우, 김성수 등과 교류하게 된다. 이후 서울의 휘문의숙에서 수학했고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17년 한국으로 돌아온 현준호는 은행설립을 준비하여 1919년 7월 30일 호남은행 설립을 신청하였고, 1920년 2월 9일 설립인가를 받게 된다. 호남은행이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20년 9월 20일이었다. 목포지점이 문을 연 것은 같은 해 10월 2일이었다.
호남은행을 비롯하여 많은 지방 보통은행들이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러나 1920년 3월 이래 시작된 공황으로 보통은행의 경영여건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28년 8월 금융정책의 변화를 시도하여 은행설립을 규제하고 은행의 합병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33년 7월에는 동래은행이 호남은행에 합병되었고, 호남은행은 1942년 5월 1일 동일은행에 합병된다. 1943년 10월 1일에는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합병하여 조흥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동일은행이 되었다가 조흥은행 목포지점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은 조적조 2층 건물로 1929년 11월 11일에 준공되었다. 단순한 장방형의 2층 건물이며 외부는 러시아산 붉은색 타일로 마감되어 있다. 외벽의 아래쪽은 석조로 마감되어 있다. 현재 1층에는 영업장과 금고, 응접실, 계단실이 있고,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몇 차례의 개보수 과정을 거치면서 건물의 내부공간은 변형되어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목조 계단과 금고, 2층의 사무실, 서고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우리나라 근대 금융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건물로 특히, 일제강점기 호남지방에 설립된 지방 은행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목포에 현존하는 유일한 금융계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29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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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1:06 2009/04/16 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