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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에 발간된 '궁궐의 논물, 백년의 침묵'에 실린 원고임.

□ 경복궁(景福宮)

  1895년의 을미사변과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로 공식적인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은 1912년 총독부로 그 소관이 이관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근대 건축물이 들어선 것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개최되었던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施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로부터 시작되었다. 공진회를 위해 각종 진열관 등을 신축하면서 정전과 편전, 침전 일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공사의 편의를 위하여 궁성 동쪽 건춘문(建春門)에서 서쪽 영추문(迎秋門)에 이르는 횡단 도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약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내고 5,200여 평의 대지에 18개소의 진열관을 신축하였다. 정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석탑과 부도, 불상 등을 옮겨와 배열하였다. 이때 지어진 1호 진열관의 위치가 조선총독부 청사의 위치가 되었다.

공진회를 위해 건립하였던 미술품 진열관은 이후 총독부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공진회가 끝나자 일제는 곧바로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다. 광화문(光化門)에서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던 흥례문(興禮門) 및 그 좌우 행각과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협생문(協生門), 영제교 등이 있었던 근정문 앞 3만여 평 부지에 식민지 지배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1926년에 완공하였다. 또한 1923년 10월 5일에서 10월 24일까지는 근정전 뒤쪽에서 ‘조선부업품공진회’를 개최하였고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시정20년기념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5년에는 건청궁(乾淸宮)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병탄25주년기념박람회장’을 세웠다. 1939년에는 신무문(神武門) 밖 경복궁 후원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고, 같은 해에는 건천궁터에다 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갖는 위계성과 상징성을 훼손하기 위하여 일제는 다른 궁궐에서와는 달리 경복궁에서는 5년 단위로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를 기념하고 미화하는 박람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 또한 식민지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박물관과 미술관을 지어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수집된 유물들을 전시하면서 역사 왜곡과 식민 사관의 이식을 위한 왜곡된 이념 교육의 장으로 경복궁을 변모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 총독부 박물관

총독부 박물관은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후인 1915년 12월 1일 총독부 박물관으로 개관하였고 1916년부터 고적조사사업을 주관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고적조사사업은 평양의 낙랑유적 발굴과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신라와 가야 지역의 발굴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총독부 박물관에는 각종 고적 조사에 의한 수집품과 유물의 국고 귀속품, 사찰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전승공예품상설전시관과 학술원 등으로 사용되었고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총독부 박물관이 지어진 위치는 근정전 좌측 영역으로 원래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의 동궁지역에 해당된다. 원래 이 지역에는 중심 건물로서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資善堂)과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비현각(丕顯閣)이 있었고 그 주변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있었다. 이중 자선당은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팔려 ‘조선관’이라는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때 불타 없어졌다. 이후 자선당의 주춧돌이 오쿠라 호텔 구내 정원에 있었고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이것을 발견하고 반환 노력 끝에 1995년 12월 28일 경복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총독부 박물관은 벽돌조 2층 건물로 서양 고전주의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그림 27] 정면 중앙을 돌출시켜 주출입구를 형성하였고 코린트식 오더의 원기둥 2개를 하나의 단위로 반복시키고 있다. 돌출된 현관의 양쪽 모서리는 육중하게 처리하였고 곡선의 벽감(niche)을 파서 벽체의 육중함을 감소시키고 있다. 모서리 벽체와 6개의 코린트 오더 위쪽에는 고전주의 건축의 오더 형식에 따라 엔타블레쳐(Entablature)를 형성하였다. 좌우 대칭인 좌우측은 기단 위에 사각 벽기둥의 형식으로 단순화된 기둥 사이에 수직으로 긴 창을 설치하였다. 좌우측 부분도 모서리를 상대적으로 육중하게 처리하였고 벽기둥 위로 엔타블레쳐를 형성하였다. 그 위쪽에는 낮은 옥상 난간을 두었다. 좌우측을 중앙에 비해 낮게 처리하여 위계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림 28] 좌우측의 입면은 정면 좌우측의 입면과 동일한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주출입구에서 연결되는 중앙 홀 좌우에 전시장을 두었고 2층에도 전시장을 두었다. 건물의 앞쪽과 뒤쪽으로 넓은 서양식 정원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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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는 연면적 9,619평의 5층 건축물로 그 규모에서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전체를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해방 이전 한국근대건축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 1872-1914)가 초기 단계에서 설계를 진행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野村一郞) 등에 의해 설계가 완성되었고 일본 건설회사인 오쿠라구미와 시미즈구미(淸水組)에서 시공하였다. 1916년 6월 25일 착공하여 1923년 5월 17일 상량식을 거행하였고, 1926년 10월 1일, 10년 이상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공되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1916년에 착공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외장에 마감재로 사용된 석재는 동대문 밖 창신동 채석장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건축물 중앙의 대형 돔, 모서리의 사각 탑, 오더의 표현, 저층부의 러스티케이션 등에서 서양 고전주의 건축의 의장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사용되어 육중하고 기념비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다.[그림 29]

평면은 중정을 중심에 둔 日자 형태로 편복도를 따라 단위 공간을 병렬적으로 연속시켜 내부 공간을 구성하였다. 평면에서도 건축물 중앙 부분을 앞뒤로 돌출시키고 4개의 모서리 역시 돌출시켜 중심성과 위계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입면과 평면, 단면 등의 구성에서 서양 고전주의 건축에서 유래하는 비례체계를 적용하여 건축물을 계획하였다. 외관과 내부공간 구성의 측면에서 이 건축물은 양식주의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며 동시에 일본에 의해 양식주의 경향으로 지어진 관공서 건축이 갖는 그 상징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건축물이다.

1920년대 이전까지 관공서와 은행, 학교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양식주의 건축은 1920년대 초, 중반의 시기에 대규모의 관공서 건축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전개양상을 보이게 된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현재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는 경성부청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재판소 등의 대규모 관공서 건축에서 식민지 지배의 상징성과 권위성의 표현이 더욱 강조되어 나타났다. 양식주의 건축은 그러한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건축적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미군정청에서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앞마당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이 이곳을 인민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퇴각하면서 방화하여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950년 9월 26일 중앙청은 다시 한국군이 탈환하게 된다. 5.16 이후 복구하여 1982년까지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되었다. 1982년 3월부터 행정 부처들이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보수 공사를 거쳐 1986년 8월 21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91년부터 이 건물에 대한 철거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원형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고, 1995년 8월 15일 해방 50주년을 맞아 철거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완공된 지 70년 만인 1996년 철거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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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부 미술관

총독부 미술관은 향원정(香遠亭) 북쪽에 있는 건청궁 자리에 세워졌다. 곤녕합(坤寧閤)과 옥호루(玉壺樓) 등으로 구성된 건청궁은 신무문 남측에 위치한 건물로 1873년 고종이 건설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옥호루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는 박물관 현상설계를 1935년에 실시하였다. 박물관과 미술관, 과학관의 3동이 동시에 계획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현상설계로는 조선저축은행 현상설계 이후 2번째였다. 이때의 현상설계에는 88점의 작품이 응모했고 이중 일본인 야노(矢野 要)의 안이 당선되었다. 야노의 안은 서구식 근대 건물의 몸체에 동양풍의 목조 건축 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근대 건축물 위에 일본의 전통적인 지붕 형식을 올린 이러한 형식의 건물을 제관양식(帝冠樣式)이라고 불렀고, 서양의 근대건축에 대한 극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수주의에 기반한 군국주의가 극대화되는 과정이었다.

실제 지어지는 과정에서 당선안은 대폭 축소되었다. 우선 박물관과 과학관을 지어지지 않았고 미술관도 애초의 규모에서 축소되었다. 1939년 4월에 준공된 건물은 향원정을 향하여 남향하여 지어졌다.[그림 30] 벽돌조의 단층 건물로 지붕은 모임 지붕의 형태이다. 정면 주출입구를 돌출시켰고 좌우 대칭 형태로 지어졌다. 층고가 높아 반복적으로 배열된 창호는 고측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주출입구에서 연결되는 중앙 홀은 특별전을 위한 넓은 공간으로 계획하였고 각각의 전시실이 건물의 4면으로 연속되게 배열되었다. 이 건물은 1969년 10월 2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73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그림 31] 1998년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 지난 2007년 건청궁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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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근대 건축물

경복궁 내에 지어졌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건축물은 관문각(觀文閣)이란 이름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문각은 건청궁 내에 있었고 고종의 서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명성왕후가 거처하였던 옥호루 뒤편에 있었다. 옥호루를 찍은 사진 뒤쪽에 부분적으로 나타난 근대 건축물이 관문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32] 3층 건물로 1901년 철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일제에 의해 건청궁이 헐리던 시기에 헐렸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건청궁이 복원되었으나 관문각은 복원되지 않았다. 을미사변 당시 이 건물에는 정관헌과 돈덕전 등을 설계하였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던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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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연관된 또 다른 근대 건축물 중에 총독 관저가 있다. 총독 관저는 1939년 경복궁 신무문 밖의 경복궁 후원에 지어졌다. 이 지역에는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옥련정(玉蓮亭), 경농재(慶農齋) 등의 건물이 있었고, 경무대(景武臺)에서는 왕이 친히 군사훈련을 점검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1929년 5월 융문당 등의 건물을 헐어 목재는 매각하였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당시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고, 이름이 경무대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4.19이후 청와대에서 사용하였고 1995년 철거되었다. 총독 관저는 벽돌조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였다. 정면 중앙에 사각 기둥으로 지지되는 캐노피를 두었고 지붕은 경사 지붕으로 처리하였고, 창문 위쪽에는 차양을 돌출시켰다.[그림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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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경복궁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 현상설계를 통해 당선되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물로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등을 모사하여 집합시켰다. 현상설계가 발표되던 시기부터 논란이 많았으나 신축되어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구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로 이전하면서 1992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그림 34]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는 원래 선원전이 있던 자리로서 1932년 10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사당 박문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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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은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면서 1996년 12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용산에 계획된 국립중앙박물관이 기공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면서 발생한 임시적인 상황이었다. 2004년 10월 17일 용산 이전을 위해 임시 휴관할 때까지 약 8년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2005년부터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이 이 건물로 옮겨오면서 국립고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분 개관하였다.[그림 35]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지붕은 전통적인 형식을 모방한 기와를 얹은 모임지붕 형태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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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9 09:43 2010/04/29 09:43